자전 에세이

 

 

 

내가 꾼 꿈은 사실 꿈이 아니었네

 

 

 

이재훈

 

 

 

 

 

 

범꿈

 

다들 믿지 못하겠지만 내 태몽은 호랑이 꿈이었다. 어머니는 가끔씩 고개를 갸우뚱거리시며 지금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내 태몽을 얘기하셨다. 정말 생생하게 꾸었어. 지금도 호랑이가 내 앞에 떡 하고 서 있는 것 같아. 바늘처럼 꼿꼿하게 선 황금빛 털. 온 땅이 울리는 듯한 숨소리. 아직도 생생해. 꿈속의 어머니는 밭을 매고 계셨다. 신혼의 새댁이라 알록달록하게 수놓은 화려한 한복을 입고 계셨다. 그런데 갑자기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며 내려오더니 어머니 앞에 떡 하고 나타났다. 어머니는 놀라서 허겁지겁 도망을 쳤지만 금세 호랑이는 어머니 얼굴 앞에 다시 섰다. 그러곤 어머니 치맛자락을 물고는 놔주지 않는 것이다. 호랑이는 고깔밑까지 얼굴을 파묻고 어머니를 떠나지 않았다. 잠이 깬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태몽인 걸 아셨다. 어머니는 그전에 유산한 경험이 있었다. 이번에는 아기가 뱃속에서 떨어지지 않고 잘 들어서겠구나고 생각하셨다.

나를 잉태하고 실제로 어머니는 호랑이를 만났다고 했다. 믿기 힘든 얘기다. 하지만 어머니는 정말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부재중이셨다. 아버지께서 확신하신 신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잠시 가족을 떠나 있었다. 강원도 산골은 긴 겨울밤을 홀로 보내기엔 너무 적막한 공간이었다. 어머니는 뜨개질을 하시다가 까무룩 잠이 드셨을 것이다. 자정 무렵. 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내 방문 앞에서 멈추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문을 꼭 잠갔다. 두려웠다. 만삭의 배를 한 번 더 쓸어보고는 두 손으로 꼭 안으셨다. 날이 이슥하도록 호랑이는 집을 뱅뱅 돌았다. 온 대지가 밤새 울렸다. 그때 어머니는 보았다. 방문 틈으로 숨죽여 밖을 살펴보았을 때. 호랑이의 눈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무섭게 빛났다. 더 오래 볼 수 없어서 이내 방문을 닫고 밤새 호랑이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해가 밝았다. 호랑이는 가버렸다. 집 주위엔 호랑이가 남긴 발자국이 가득했다. 발자국 하나가 사람 얼굴 만 하다고 했다.

다소 과장이 섞인 이야기겠지만 어머니는 겨울밤에 만났던 그 짐승이 호랑이라고 굳게 믿고 계셨다. 담이 없는 산 밑의 외딴 시골집에는 짐승들이 자주 출몰했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호랑이가 가끔씩 출몰한다는 소문도 수근거렸으리라. 1972년의 일이다.

이것은 어떤 사건일까. 운명이라고 하기엔 호랑이가 내 형상이나 기질과 맞지 않고, 우연이라고 하기엔 마치 신탁처럼 너무 생생하다.

나는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주문리(일명 모운동)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하동면이 김삿갓면으로 개명되었다. 내 태어난 곳 근처에 김삿갓의 무덤이 있다. 지명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 ‘모운동’은 구름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이다. ‘모운동’은 구름처럼 떠돌며 살다간 김삿갓(난고 김병연)을 이곳으로 다시 오게 했다. 한때는 산속의 석탄을 캐러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렸던 곳이다. 지금은 노인들만 남아 있는 고요한 마을이 되었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운명인 걸까. 나 또한 이십대까지 구름처럼 전국을 떠돌며 살았고, 김삿갓처럼 시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김삿갓의 혼이 담긴 곳과 가장 가까이에서 태어난 시인인 셈이다.

 

 

겨울

 

내 유년의 겨울은 유독 길었다. 강원도를 두루 다니며 살았던 덕이다. 나는 겨울에 태어난 겨울 아이다. 내 감각이 가장 예민하게 기억하는 계절 또한 겨울이다. 찬바람이 불어야 비로소 나는 모든 것들이 예민하게 감각된다. 찬바람이 콧속으로 들어와 온몸이 차갑게 식어가는 느낌이 들 때야 비로소 나를 느낀다. 늦가을부터 시작되는 찬기와의 만남은 날 설레게 한다.

강원도의 산골은 일 년의 반이 겨울이나 다름없다. 여름이 지나면 곧바로 김장이 시작된다. 그리곤 긴 겨울이 시작된다. 어느 겨울엔 자고 일어나니 온 세계가 전부 눈으로 덮인 날도 있었다. 방문을 여니 흰 눈이 너무 눈부셔 눈을 뜰 수 없었다. 내가 디딤돌을 밟고 올라타야 오를 수 있는 마루에까지 눈은 차올라 있었다. 어느 곳이 마루이고 마당이고 대문인지, 어느 곳이 길이고 도랑이고 담벼락인지 모를 정도로 온 세상이 눈으로 가득했다. 초등학교 2학년쯤이었다. 자동으로 방학이 되어 그날부터 학교엔 가지 못했다.

군인들은 그날부터 마을로 모두 나와 눈을 치웠다. 우리 꼬맹이들은 터널을 만들고 이글루를 만들어 놀았다. 손과 발에 동상이 걸리도록 놀았다. 그때 우리들은 누구나 동상 한번쯤은 걸렸다. 저녁나절엔 친구의 아버지가 우리집에 고기를 가져다 주셨다. 친구의 아버지는 육군 중사였다. 그 고기는 오늘 잡은 멧돼지라고 했다. 나는 멧돼지 고기를 그날 처음 먹어 보았다. 아, 멧돼지, 토끼, 꿩, 사슴, 개구리, 그리고 온갖 민물고기 등을 그때 다 먹었었다. 아쉽게도 그 맛을 지금 다 기억하지 못한다.

잊지 못할 유년의 죽음이 있었다. 당시 내가 사랑했던 강아지의 죽음이다. 강아지의 이름은 물론 메리였다. 강아지라면 누구나 이름이 메리였던 시절이었다. 메리는 한겨울에 얼어 죽었다. 그것이 병인지 동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침에 일어나 메리집으로 가보니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렇게 추운 날 내가 부엌으로 옮겨놨어야 했는데 하는 심한 죄책감이 일었다.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 한겨울에 내복만 입고 개집 주위를 한참이나 서성였다. 나중 아버지와 함께 파묻어 주었다. 우리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강아지의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강아지의 주검은 옷으로 잘 감싸서 땅을 파고 묻었다. 작은 봉분도 만들었고 그 위에 십자가도 세워주었다. 이 절차는 모두 내가 집행했다. 아버지는 묵묵히 지켜보고만 계셨다. 내가 다른 영혼을 위해 가장 간절히 기도할 수 있다는 걸 아마 그때 깨닫지 않았을까. 이별의 아픔은 다른 사랑으로 회복되듯이 곧 나는 다른 강아지를 들여 그 아픔을 회복하였다. 강아지와 함께 골목에서 골목으로 마을 어귀에서부터 강가에 이르기까지 뛰어다니면 행복했다.

 

 

편식

 

언제부터인가 편식이 시작되었다. 우유도 맛이 없었고 고기도, 멸치도, 콩도, 달걀도. 세상에 어린이들에게 몸에 좋다는 음식은 모두 맛이 없었다. 그때 맛있었던 음식은 라면과 김 정도. 우유나 삶은 달걀 흰자를 먹다 토하기도 했다. 돼지고기는 입안에 넣자마자 몰래 뱉어내었다. 우유와 달걀에 대한 거부감은 거의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이어졌다. 밥도 맛이 없어서 라면 스프나 설탕에 비벼먹기도 했다. 어떤 날은 밥을 남기면 혼날까봐 엄마 몰래 땅속에 밥을 파묻기도 했다.

친구들은 냇가에서 피라미를 잡아 그 자리에서 배를 따고 씹어 먹었다. 어른들 흉내를 내느라 된장을 가져와 피라미와 마늘쫑을 함께 찍어 먹기도 했다. 나도 따라 했다. 아무리 맛이 없어도 친구들이 하는 건 따라 했다. 동산에 가서 오디를 따먹기도 했다. 혓바닥과 이빨이 새까매지도록 오디를 따먹고 주전자에 한 가득씩 담아 왔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어린 시절 먹었던 대부분은 가장 천연의 자연식인 것이다. 아직 오염되지 않은 강원도 산골에서 냇물과 공기와 자연의 모든 것들을 먹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편식 때문에 키가 크지 않고 점점 말라갔다.

 

 

편지

 

이사를 자주 다녔다. 전학을 가면 낯선 환경과 친구들과 적응을 해야 했다. 친구들이 못살게 굴기도 하고 놀리기도 했다. 나는 얼굴이 하얀 편이어서 대부분의 친구들이 도시에서 전학을 온 것으로 오해했다. 전학 오는 학생이 흔치 않은 때였다. 한 학년에 한 반이거나 두 반이 전부였던 학교에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전학생을 구경하러 왔다. 전학 선물로 받아온 내 자석필통이나 샤프펜슬, 공책을 구경하기도 했다. 엄마가 입혀주신 새 옷에 흙을 칠하거나 운동화를 밟기도 했다.

전학을 자주 다니니 언제나 이방인이었다. 나는 그곳의 친구들과는 다르고 영원히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이방인이라는 경계 위에서 위태롭게 관계를 유지하다가 마음에 맞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이상하게 그런 복은 있는 것이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보지는 못했지만 늘 친구들은 내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친구들이 생겨서 친해지고 서로 손을 맞잡으며 어깨를 부딪칠 무렵 또 전학을 가야 했다.

편지를 썼다. 이곳에 오면 저곳의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를 쓰며 그리워하는 것이 취미가 되어 버렸다. 편지쓰기는 고등학교 때까지 이어졌다. 종이에도 쓰고, 화장지에도 쓰고, 잘 말린 은행잎에도 썼다. 사진도 보내고, 낙엽도 보내고, 그림도 그려 보내고, 좋아하는 노래를 녹음한 테이프도 보냈다. 어쩌면 내 문학의 출발은 편지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대학 때까지 주고받았던 그 수많던 편지들은 나중 어머니에 의해 불에 태워져 없어진다. 그 사실을 나중에 안 나는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며칠 동안 잠이 안 올 정도였다.

 

 

서재

 

초등학교때 나는 <새벗>이라는 잡지를 정기구독 했다. 아버지는 월부 책장사들에게 최우수 고객이었다. 아버지는 책에서만큼은 금방 현혹되어 신청서에 사인을 하셨다. 어머니는 무척 스트레스를 받으셨다. 빠듯한 살림 때문에 월부책을 더 이상 들여 놓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새벗>보다는 <어깨동무>나 <새소년>을 더 좋아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어깨동무>나 <새소년>에는 만화가 있었으니까. 송년호나 신년호 잡지는 그야말로 놓칠 수 없었다. 만화만 있는 특별호가 따로 나왔으며 각종 선물이 즐비했다. 내 생일이나 성탄절 선물은 물론 <어깨동무>나 <새소년>이었다. <어깨동무>의 발행인이 육영수 여사였으며 육영수가 죽자 박근혜와 육영재단이 발행인이었다는 것은 아주 나중에 안 사실이었다.

아버지의 서재에는 신학책들과 각종 월부책들로 가득했다. 나는 가끔씩 그 서재에서 한나절을 보내기도 했다. 퀴퀴한 곰팡내가 나는 시골집 한 켠의 서재. 이 서재만 없었다면 이 방은 내 방이 되거나 우리 형제들의 방이 되었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의미도 내용도 모르는 서적들을 암호 해독하듯 읽었다. 어린이 동화전집은 읽지 않았다. 재미가 없었다. 기억나는 책들로는 삼성출판사간 한국현대문학전집, 까뮈 문학전집, 보들레르 시집 등이었다. 70권짜리 세로쓰기판 한국현대문학전집은 내가 한동안 가지고 있다가 최근 동생네 집으로 분양되었다.

 

 

데미안

 

중학교 때까지 교회와 집과 학교가 내 세계의 전부였다. 집에서는 비교적 말 잘 듣는 장남이었고 교회에서는 신실한 배냇교인이었다. 학교에서도 말썽 안 부리고 성실한 학생이었다. 또래보다 조숙하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 학생이기도 했다. 하지만 교회와 집 이외의 다른 세계를 경험한 친구들의 사정에 둔감했으며, 그곳의 일들을 두려워하기도 했다.

사춘기가 늦게 찾아 왔다. 남들보다 늦은 사춘기 때문에 당황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실존에 대한 고민이 더욱 깊어졌다. 신앙에 대한 회의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내 인식을 뒤덮었다. 태어나서 내 스스로 선택한 길은 하나도 없었다. 누군가의 아들로 태어나 누군가의 아들로 계속해서 자라나고 있었다. 내가 선택한 길을 찾고 싶었다.

부모님은 다시 먼 곳으로의 이주를 결정하셨다. 이번에는 충청도였다. 나는 혼자 남겠다고 선언하듯 얘기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 나는 혼자 남게 되었다. 남아 있는 고등학교 생활 동안 자취를 했다. 그때부터 내 인생은 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학교와 교회를 벗어난 경계 바깥의 학생으로 조금씩 변해갔다. 이탈된 자가 되어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고 산 자의 연약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 세상엔 피 묻은 상처를 어쩌지 못해 들고 다니는 이탈자들과 나처럼 스스로 선택한 이탈자들이 많았다. 개중엔 간혹 건강한 이탈자들도 있었다. 나는 다른 세계의 이곳저곳을 엿보았고, 때론 함께 살았다. 함께 산다는 것의 즐거움과 어려움을 느꼈으며, 성숙하지 못한 다짐의 결말을 많이 맛보았다.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너무 놀랐다. 소설 속의 싱클레어가 바로 나였으니까. 그리고 머지않아 소설 속의 데미안도 나였으니까.

선언하듯 대학을 포기하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친구들은 대학으로, 업소로, 재수학원으로 도피하듯 들어갔다. 그때 내 눈에는 명문대에 입학한 친구들도 꼭 도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갖은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마음이 동하면 그날로 처음 가보는 남쪽행 기차를 탔다. 사람살이의 모든 게 우스웠다. 그런 시절이었다. 그만큼 꽤나 지쳐 있었다.

나를 위로한 것은 예상치 않게도 문학이었다. 갑자기 내 삶에 문학이 확 끼어들었다. 일이 없는 날은 용산도서관을 매일 들락거렸다. 주로 소설과 사상서, 문예지를 읽었다. 헤르만 헤세와 프란츠 카프카를 신봉하게 되었다. 앙드레 지드는 취향은 아니었지만 매력적이었고, 보들레르나 랭보를 읽으며 미친 인간들의 미학을 엿보았다. 손창섭과 이승우에 감복했다. 이승우는 지금도 내가 최고로 치는 한국작가이다. 그 외 셀 수 없이 많은 작가들, 시인들, 사상가들과 만났다. 만났다 헤어지고, 잊히다 다시 만났다. 그때부터 돈이 생기면 각 출판사의 시인선을 모으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시인선의 시집들을 구하게 되었다. 순례하듯 헌책방을 다니며 모았고, 읽었다.

 

 

시인

 

부모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뒤늦은 나이에 대학을 가게 되었다. 간신히 턱걸이로 부모님이 계시는 지방에 신설된 대학에 입학했다. 국문학을 전공했다. 1학년 때에는 적응을 못해 학교에 결석하다시피 했다. 학교보다 서울을 더 자주 들락거렸다. 다행히 교양과목이 많아 학번 동기들이 대리출석을 해주었다. 새로 생긴 대학이라 교수님들의 열정이 대단했다. 1학년을 마치고 도피하듯 군대에 방위병으로 입대했다.

입소하기 이틀 전, 소꿉친구의 부고가 날라왔다. 예기치 않은 일이었고 충격적인 일이었다. 자동차가 눈길에 미끄러진 교통사고였다. 그 친구는 우리들이 모두 위로받고자 하는 만인의 여자친구였다. 힘들 때 늘 누나처럼 위로하였으며 편지를 많이 주고받았다. 도저히 친구를 떠나보낼 수 없었다. 그 마음을 고스란히 안은 채 군대에 입소했다.

군대 복무를 마친 후 복학했다. 누구나 그렇듯 나의 짧은 군대이야기는 장편소설로 써도 모자랄 것이므로 넘어가기로 한다.

뒤늦게 열병을 앓듯 시를 썼다. 다행히 문학이 전공이었으므로 재미있었다. <시심문학회>의 회장이 되었다. 여러 곳을 오가며 시 쓰는 티를 냈고, 시 앞에서만큼은 수줍은 성격이 열정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각종 신춘문예와 문예지에 응모를 했다. 어쩌면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시밖에 없었던 시절. 연애하면서 당신은 시가 좋아요? 내가 좋아요? 라는 질문을 받던 시절.

운이 좋았을 것이다. 대학 4학년이 시작되기 전 겨울방학. <현대시>에서 당선 통보가 날라 왔다. 친구의 자취방에서 며칠을 묵었던 탓에 내게 연락이 안 되었다고 한다. 잡지사 편집자는 하소연을 했다.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었느냐고. 죄송합니다. 삐삐의 배터리가 다 달아서요. 당시 내 무선호출기 번호는 012-405-4329였다. 당선작은 「수선화」 외 4편. 다들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시인이 되었다. 이건 허구가 아니다.

 

 

시의 삶

 

대학 졸업 후 다시 서울로 상경하여 대학원에 입학했다. 시의 삶을 살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더 하기로 했다. 또다시 고달픈 사람살이의 연속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견딜 만했다. 시의 삶이며 시인의 삶이니까.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다들 아시는 바와 같다. 내 연보에 대충 나오는 얘기들이니까. 시와 함께 하는 고통스러운 행복을 지금까지도 누리고 있다.


_ <현대시>, 2014년 5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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