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이무첨의 시간

 

 

나민애

 

 

 

  울었지. 허벅지가 패고 뺨에 피가 흐르지. 우리는 어디에서 짐승처럼 왔을까. 당신의 기별을 기다리며 안절부절하는 날들. 먼 시간을 건너왔을까. 천 년 전부터 서로의 몸을 기억했을까. 기억이란 늘 중심이 다를텐데.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검은 밤의 시간을 가로질러 왔지. 그때 우리는 참담했을까. 누군가는 나를 기억하고, 누군가는 내가 뱉은 말들을 기억하지. 아무도 없이, 아무에게도 위로받지 않고 잠들고 싶었지.

  내 겨울엔 소리가 없지. 모든 사물은 배경으로만 존재할 뿐. 두려움은 고독 때문인 것. 문을 열고 나가면 그뿐인데. 전략 없는 삶이 늘 자랑스러웠지. 슬픔에도 정도가 있다면 나는 어떤 고통쯤에 닿았을까. 우린 숨고 싶어 안달 난 사람들. 묘한 시간이 지나면 어느덧 시의 동지들. 불을 만지고, 물을 만지고, 공기를 만지는 손들.

  우울이 병은 아니지. 무엇을 요구할 수 없는 사십대가 된 것뿐이지. 달이 떠오르는 시각. 달빛의 광경보다 텅 빈 마음이 들어온 거지. 중년의 형편이 가장 누추할 때. 땀이며 피며 살갗이 흘러내리지. 이제 갈 시간이 된 것. 도시에서, 혹은 상스럽고 선정적인 인문학의 세계에서.

  - 이재훈, <짐승의 피> 전문(<세계의문학>, 봄호)

 

 

이재훈 시인의 시를 읽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그 시인을 통해 ‘불완전한 성인(成人)’의 위태로운 사회적 위치와 불안한 심리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30세의 이립(而立)을 지났어도 세운 것은 하나 없고, 40세의 불혹(不惑)이 되었어도 미혹되지 않은 바 없다. 많은 ’성인‘들이 모여 시에서처럼 ’우리‘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성인이 되었음은 물론, 성인이 된 지 한참 지났어도 21세기의 성인들은 ’미성인(未成人)‘의 처지에 있다. 이재훈 시인의 작품에는 성인이되 성인이지 못하다는 이 모순적 자의식이 존재한다. 더불어 뒤틀린 자의식이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고통과 살 타는 냄새가 가득하다.

이 고통의 냄새를 민감하게 맡고, 그 냄새의 원천지를 찾아 나서는 독자의 심정은 아마도 타인의 표정에서 자기 얼굴을 찾아내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내 고통의 표정을 타인의 고통의 표정에서 찾아내는 즐거움, 이것이 이재훈 시인의 시를 읽는 두 번째 이유이다. 내가 고통스러운 것처럼 그도 고통스럽구나 내지는 내 타는 살보다 저 사람의 살은 더 타고 있구나, 이렇게 비교 가능한 고통을 확인하는 것은 고통을 견디는 데 위안이 된다. 매우 야박한 일이지만 나만 아픈 것이 아니라 너는 더 아프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고통의 심리적 지수는 체감상 낮아지게 된다.

그렇지만 체감상 낮아질 뿐 고통은 여전히 고통이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안절부절하는 날”과 “참담”은 계속되고, “형편이 가장 누추”하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변함없는 것을 변하게 할 힘이 없는데 그렇다면 이런 사실을, 못난 현실과 못난 나를 고발하는 행위는 무슨 가치를 지니고 있을까. 이재훈의 시를 읽는 세 번째 이유가 바로 이 점에 있다. 그의 시는 오욕과 더러움과 진땀의 세계에 속해 있고, 그것을 어쩌지 못하고 건너는 ‘개 같은 날들’의 기록이다. 이렇게 더러움을 깨끗하다고 말하지 않고, 참 더럽다고 말하는 심리는 무엇일까. 나는 이재훈 시인의 주먹에는 ‘빈이무첨(貧而無諂)’의 세계관이 쥐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더럽지만 그래, 더러우니까 나만 깨끗하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가난하지만, 가진 것은 없고 미혹과 불안만이 있지만, 아첨하지는 않겠다. 이것이 ‘빈이무첨’의 정신이고, 완전히 짐승 쪽으로 건너가지는 않겠다는 마지막 마지노선이다. 도시를 욕하면서 그곳에 사는 도시인뿐만 아니라 “상스럽고 선정적인 인문학의 세계”를 욕하면서도 그 세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더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죽을 때까지 풀지 않을 주먹에 ‘빈이무첨’을 꼭 쥐고 이 세계를 건너는 자세 말이다.

 

― <문학사상>, 2014년 7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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