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계곡 라다크 투르툭에서의 이틀

 

 

 

이재훈

 

 

 

 

 

인도의 라다크는 내게 늘 관념 속에서만 머물렀던 정신적 공간이었다. 헬레나가 <오래된 미래>를 통해 소개한 공동체 낙원 라다크. 문명이 서서히 들어와 변질되어가는 히말라야 고원의 라다크. 하지만 라다크의 실체는 사회학자들이 얘기했던 현상을 느낄 수 없을 만큼 태고의 원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곳에서의 열흘 동안 나는 태초의 신비를 탐했다. 숨 쉬기 힘들었고,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았으며, 전기는 자주 끊겼다. 많은 것들이 불편했지만 마음만은 평화로웠다. 내 마음에도 평화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곳이 라다크이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알 수 없는 평화로움이 물밀듯 밀려와서 잠깐 난감하였으나 곧 그 평화로움을 누리게 되었다.

라다크에서의 열흘 동안 가장 평화로웠던 시간은 아마도 투르툭(Turtuk) 마을에서 지냈던 이틀일 것이다. 여행의 마지막 이틀을 투르툭에서 소요하며 보냈다. 투르툭은 라다크의 주도인 레(Leh)에서 10시간 정도 걸리는 마을이다. 우리 일행은 레에서 누브라 밸리로 갔고 누브라의 훈다르 마을에서 하룻밤 캠핑을 하고 투르툭 마을로 이동했다. 투르툭 마을은 파키스탄의 국경과 마주한 지역이다. 이전에는 개방이 되지 않았던 곳인데 2010년 인도 정부가 여행 제한을 풀었다고 한다. 그래서 더 신비하고 더 원초적인 곳이었을까.

투르툭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황토물이 산처럼 굽이치는 강을 만났고, 흙과 돌로만 쌓아올려진 누런 민둥산을 끝없이 오르내렸다. 때론 작은 초원이 있는 마을을 지났고, 마을에서 밀을 수확하는 여인들과 만나기도 했다. 어딘가를 가는 길은 늘 닿는 시간보다 가는 시간이 즐겁다. 투르툭으로 가는 길에는 욕망이나 격정보다는 광막한 막막함이 더 자주 다가왔다. 그 막막함이 왠지 모르게 좋았다. 이 막막한 풍경 속에서 시간도 잊은 채 나른하게 취하고 싶었다. 늘 취하고 싶었으나 취할 수 없는 긴장의 시간을 즐긴 것이라고 말할까.

투르툭에 도착하자 이곳은 한없이 게으를 수 있고 한없이 상상할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멍 하니 바라보거나 멍 하니 앉아 있으면 되었다. 특별한 일정이나 계획 없이 이틀을 꼬박 빈둥거리며 지냈다. 투르툭은 어렸을 적 자주 갔던 외가의 마을과 닮아 있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에는 오래된 돌계단이 있었고 돌담이 둘러쳐 있었다. 마을 전체에 키 높이의 돌담이 있었고 돌담 사이로 작은 골목길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나는 그 골목길에서 자주 서성였다.

마을의 골목길 중간중간 아주 오래된 살구나무들이 많았다. 투르툭은 살구나무의 마을이었다. 작은 도랑이 흘렀고, 햇살은 따사로웠다. 그러다 투르툭의 아이들을 만났다. 어디에서나 그렇듯이 아이들은 천진난만했고 이 세상을 다 가진듯한 밝은 표정이었다. 아이들은 쓰러진 나무 기둥에 모여 앉아 낯선 외국인을 구경했다. 특히 아이들은 디지털 카메라에 폭발적인 관심을 보였다.

몇 백년이 되었을지 모르는 돌담길을 따라가다 보면 마을 아이들을 위해 만든 수영장도 있다. 물을 가두어 만든 수영장에서 수십 명의 사내 아이들이 벌거벗고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곳은 인도의 다른 지역과 다르게 이슬람 교도들이 대부분이다. 여인들은 히잡을 쓰고 다닌다. 또한 낯선 남자들에게 경계심이 강하다. 그리고 이곳 여인들은 농사일을 도맡아 한다.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짚단을 지게에 짊어지고 다니는 여인들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아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는 아주 작은 사원이 있었다. 사원을 올랐다. 돌담길을 지나 너른 흙길을 지나 나무들이 숨을 뿜어내는 작은 숲길을 지나 언덕으로 오르는 돌밭을 지나 마을의 꼭대기까지 올랐다. 돌계단을 오르고 올라 가쁜 숨을 몰아쉰 후 언덕의 꼭대기에 오르니 원시의 마을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쪽 너머의 산으로 강은 굽이치고 있었고 여러 겹의 산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나무들과 작은 초원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언덕 위에 앉아 한참동안 풍경에 취해 있었다. 작은 사원 안에는 명상을 하는 서양인들이 몇몇 있었다. 여행객이 아니라 구도자에 가까운 파란 눈동자의 젊은 명상가들에게서 무엇인지 모르는 자유가 느껴졌다. 자유는 자신의 외적인 모습에 신경쓰지 않는 태도에서 풍겨나오는 것임을 알았다. 나도 저런 삶을 바랐었는데 어쩌다 지금 이렇게 살고 있을까.

라다크는 바람의 계곡이다. 우리도 바람을 만났다. 작은 마을에 갑자기 불어닥치는 바람에 몸이 날아갈 지경이었다. 아이들은 바람을 맞으며 바람놀이를 하고 있었다. 바람 때문에 잠시 무서웠다. 그러나 곧 평온해졌다. 도둑처럼 들이닥치는 이곳의 바람은 늘 이런 식인가보다. 골짜기에 숨어 있는 마을은 바다의 외딴 섬처럼 존재해 있다. 하지만 이런 바람을 맞아들이는 마을이다. 투르툭은 바람을 맞아들이며 스스로 가쁜 숨을 뿜어낸다. 그러다 때론 침묵한다. 마을의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보면 조잘조잘 수런거린다. 그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음악을 며칠 동안 한없이 들었다.

나는 게으름을 좋아한다. 게으름이 여행의 본질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게으름에도 격이 있다면 이곳에서의 게으름은 그럴 듯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색에도 쾌락이 있다면, 사색을 유희할 수 있다면 트르툭에서는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도시에서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허무의 관념들이 이곳에서는 한 번도 생각나지 않았다. 이 마을에서 나는 며칠만 머무른 나그네일 뿐이다. 길손이 되어 그들에게 무엇을 던져주고 간 존재일 뿐이다. 일방적일 수밖에 없는 여행객은 그들의 모습과 풍경 속에서 많은 것을 담아간다. 그들은 나를 통해 무얼 생각했을까. 트루툭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 삶의 속도대로 산다. 그렇게 오래오래 그들의 속도대로 천천히 소요하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쏟아질 듯한 별을 보며 누워 있던 트루툭의 밤이 아련하게 그립다.

_ <대전평생교육>, 2015년 1~2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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