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 있는 시에 관한 짤막한 단상들

 

 

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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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쓸 것인가 라는 질문은 시가 늘 거느리고 있어야 하는 화두와도 같다. 내가 쓰고 싶은 시는 영성, 숭고, 신화, 악마와 천사, 선과 악, 광기, 공동체, 도시, 문명, 미디어, 돌과 같은 주제나 소재의 것들이다. 이런 주제는 지금의 생각이지 내일이 되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때론 다른 주제어가 속속들이 추가될 것이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미래에 씌여질 내 시는 어떤 내용과 스타일일지는 나도 궁금하다. 시는 마치 운명처럼 태어나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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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와 대장장이는 ‘불의 지배자’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어떤 물질을 다른 물질로 변화시켜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능력은 ‘불’에 의해서 가능하다. 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연금술사의 능력이다. 어떤 온도에서 어떤 시간을 통해 다른 물질을 만들어내느냐가 연금술사와 대장장이의 가장 큰 관심일 것이다. 그들은 불을 잘 만지기 위해 샤먼의 도움을 받기도 하며 때론 스스로 샤먼이 되기도 한다. 불을 지배한다는 것은 영혼을 지배한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시도 연금술사가 이르려고 하는 샤먼의 지위에까지 다다르려는 욕망을 간직하고 있다. 대체 좋은 시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읽고 평가하는 시가 좋은 시일까. 좋은 시란 불가능한 가치이다. 다른 시가 있을 뿐이다. 어쩌면 시인의 속임수에 놀아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시인은 한 편의 시를 만들기 위해, 전혀 다른 인식의 물질을 만들기 위해 이리저리 골몰한다. 마치 불을 만지는 것처럼 언어의 온도와 시간과 기다림과 섞음과 난데없음을 오랜 경험치를 통해 실험해보는 것이다. 좋은 시인지 아닌 시인지는 시인의 몸이 즉각적으로 반응할 것이다. 시 한 편으로 뜨거워지는 몸이 된다면 시인은 벅찰 것이다. 시 한 편으로 뜨거운 몸을 갖고 싶다. 이런 시라면 매일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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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돌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상상하던 때가 있었다. 가끔씩 하늘에서 돌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지금의 운석을 그리 생각했던 것이다. 돌은 인간과 가장 가까이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가장 오래된 물질이다. 많은 신화에서는 최초의 인간이 돌에서 나왔다고 한다. 돌이 간직한 원시의 시간성은 지금 현재에까지도 그 실물로 남아 있다. 돌에 비하면 인간의 시간은 너무나 짧다. 그렇기 때문인가. 인간은 돌에게 절을 하고, 돌로 신의 형상을 만든다. 이 돌의 상상력은 한동안 계속 내 시의 언저리를 떠나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생각들이 다음과 같은 졸시를 낳기도 했다.

 

돌은 투명하다.
그 몸에는 연혁이 없다.
돌 위에 문자를 새기는 것은 돌을 욕되게 하는 것.
돌은 인간 이전의 사물.
기원을 알 수 없는 시간이다.
돌에 절을 하는 사람들.
돌 속에 병(病)의 영혼과 천사의 영혼이 깃든다 했다.
가끔씩 하늘에서 돌이 떨어졌다.
외계의 시간까지도 이승의 시간과 섞이는
무한의 돌.
그 돌로 촉(鏃)을 만들고 도끼를 만들었다.
동물을 죽여 몸을 취했고
같은 종족을 죽여 또 다른 몸을 취했다.
어머니의 뼈를 땅속에 묻고
뼈가 돌이 되어 땅 위에 솟았다.
처음은 모르나 몇 천 년이 지나면
모든 존재는 돌에서 태어난다.
돌을 던지면 울음이 들린다.
돌이 땅에 던져지면 마치 아기처럼
온몸이 땅속에 안긴다.
돌을 깨고 나온 사람들.
돌로 된 집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돌을 하늘에 던지면 그저
별이 된다.

 

- 졸시 「돌의 시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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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과 ‘호빗’ 시리즈는 결국 선과 악의 싸움이다. 선악의 구도에서 악한은 오로지 악한일 뿐이다. 선인의 그룹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우정’이다. 우정은 공동의 싸움에서 더욱 빛을 발하며 역경과 고난을 통해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된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가치는 우정인 셈이다. ‘우정’의 시가 있다면 나는 ‘우정의 시’를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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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핀처 감독의 <나를 찾아줘, Gone Girl>는 사라진 아내를 찾아나서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 아내 에이미(로자먼드 파이크)는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진 소름 돋는 악녀이다. 에이미의 허영과 사회적 욕망과 대중에게 비치는 미디어적 욕망과 끊임없이 자기를 봐달라는 대중 노출증과 통제하지 못하는 감정선들이 영화를 보는 내내 뜨겁게 다가왔다. 소름 돋는 악녀를 이해하고 싶었다.

어쩌면 시인들은 이런 복잡하고 미련하고 위태로운 내면을 모두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 속에는 이런 복잡하고 미련하고 위태로운 것들이 다 들어 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욕망과 허영과 부질없음의 극단에 내 시의 감수성이 슬쩍 가닿는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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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술자리. 삶의 변화가 없다면 시의 변화도 없다는 말을 들었다. 시의 변화를 위해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 하지만 삶의 변화를 실행해본 시인들은 모두 말린다. 자칫 삶이 시를 초라하고 궁색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인으로서의 자존을 지킬 수 있는 삶의 자리는 누구에게나 제각각 있을 것이다. 자기가 아는 그 자리를 찾으면 된다.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은 자리에서 매일 노을을 맞으며 시를 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내가 있어야 할 시의 자리. 시인으로서 자존을 지킬 수 있는 삶의 자리. 그 자리를 찾아 지금도 방황하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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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극찬을 믿지 못한다. 글쟁이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독약은 극찬이다. 특히 시인에게 극찬은 친분의 또다른 말일 뿐이다. 저마다 자기 언어가 살 가장 알맞은 집을 짓고 있을 뿐이다. 겸손과 열등감을 자만과 자존을 구분하지 못하고 늘 괴로워하는 정신 파탄자들. 나또한 그 파탄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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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성으로는 그 무엇도 설명할 수 없다. 지금의 이런 축축한 마음도. 마른 하늘에 눈이 내리는 이 기막힌 풍경도. 시가 무엇을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지금 이 기막힌 시간을 전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러기에 내 언어는 너무도 짧다.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내 시에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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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하시라. 당신의 신발은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 그리고 당신의 펜은 모든 거짓을 알고 있다. 완벽하게 진실한 글은 이 세상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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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인은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되었다. 이게 모두 페이스북과 트위터 때문이다. 누구나 자발적 고독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누구도 훔쳐보는 말들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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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 부과된 권리는 외로울 권리이다. 외로움을 즐기며 청승떨 권리가 시인에게는 있다. 이 권리를 오로지 지켜내고, 그 권리를 옹호할 시를 써야겠다. 외로울 권리에 대한 장전은 시에 빼곡히 들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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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노래가 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 마시라. 랩도 처음에는 노래가 아니었다. 나는 노래를 하는 것일까. 앞으로 노래가 될 말을 하는 것일까. 어떤 방식이든지 노래가 된다면 행복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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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얼거림, 짜깁기, 단상의 나열, 긴장 없는 토로, 현학적 자랑, 철학 베끼기, 상투적인 감상성 등을 시라고, 더군다나 훌륭한 시라고 말하는데 동의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아무리 유행 따라 사는 것도 제멋이라지만. 가급적 유행과는 저 먼 곳에서 이상하지만 전혀 촌스럽지 않은 옷을 입고 싶다. 그 옷을 좋아해주는 마니아들이 있다면 더욱 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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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적으로 언어에 대한 순결함을 가진 시인들을 보면 결국 오래오래 시를 쓴다. 시의 언어에 대해서는 병이 들어야 한다. 병든 시, 순결한 언어는 한낱 이상일 뿐이겠지만 여전히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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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앙상한 나뭇가지는 비바람과 눈보라를 기다린다. 비바람에 온몸이 흔들리고 물기를 가득 머금은 나무는 생기가 돈다. 눈보라에 휘날리고 눈을 맞아 눈꽃을 피운 나무는 아름답다. 아름다움을 시로 쓸 수 있을까. 어쩌면 지금까지 너무 추한 것만을 찾아 다녔다. 추한 몸들만 느끼고 좋아했다. 아름다움을 느낄 나이가 된다면 시도 아름다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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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시를 쓴지 이십년이 넘어서야 겨우 김소월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동안 내가 너무 오만했던 것일까. 평소에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김소월이 가끔씩 머릿속에서 튀어나올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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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도 근육이 있다면 그것은 어조일 것이다. 어조의 힘으로 끌고나가는 시가 있다. 유치환과 김수영이 그렇다. 어조의 힘. 힘의 어조. 배는 자꾸 나오고 근육은 자꾸 느슨해진다. 이렇게 나이 먹지는 말자. 차라리 나온 배에라도 근육을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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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이 스타일을 만들 수 있을까. 반복은 주술의 힘이 아니라면 지겨울 뿐이거나 노래의 후렴일 뿐이다. 스타일은 반복을 지탱하는 질서에서 나온다. 질서가 바탕에 있어야 반복이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승훈은 몇 안 되는 진정한 스타일리스트이다. 스타일리스트가 되려면 얼마나 지독해야 할까. 더 지독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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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주체에 대해서 자꾸 골몰하면 길을 잘못 들 수 있다. 주체가 목소리의 내면이라고 한다면 대부분 시인의 장난에 말려든다. 주체는 어쩔 수 없이 택할 수밖에 없는 목소리라고 치부해야 한다. 참여시나 노동시에서는 주체를 잘 얘기하지 않는다. 사회적 자아를 배면에 내세우니까. 하지만 이런 시들의 주체는 모두 제각각 다른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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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을 떠나 시를 읽기란 쉽지 않다. 시를 읽으면 자연스레 그 시인의 얼굴이 떠올려진다. 혹은 그 시인이라서 그 시를 읽을 때도 많다. 그 시인이 싫어서 시가 싫거나, 아예 시를 폄하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결국 읽어야 할 시는 읽게 되고 남을 시는 남게 된다. 누군가가 내 시를 읽었을 때 내 얼굴이 떠올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얼굴을 떠올리며 시를 읽는다 생각하면 도저히 시를 쓸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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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원 더 싼 곳을 찾기 위해 인터넷의 바다를 몇 시간 동안 헤맨다. 결제하고 나니 더 싼 곳이 보인다. 그러한 허망함. 더 싼 곳을 찾기 위해 벌이는 바보 같은 사투. 욕망이라고 부르기에도 부끄러운 아주 저렴한 나를 발견했을 때. 꼭 그런 저렴한 시를 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시가 이런 것까지 허락할까. 500원 할인을 위해 충혈된 눈이 부끄러워 시를 쳐다볼 수 없을 때가 있다. 시를 읽다가 눈이 충혈된 때가 언제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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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늘 가능성을 염두하기보다는 이상을 꿈꾸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가능성에 대한 책임은 그 누구도 지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의 문학은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어쩌면 가능성 없는 자에게 하는 덕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로 인해 당신은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시의 이상도 그럴 것이다. 문학적 가능성에 가장 적절하면서도 무책임한 답변일 것이다. 스스로 자꾸 되뇌인다. 내 시는 가능성이 있다고. 그리고 시를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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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그리고 싶다. 숲을 말하고 싶다. 꽃과 열매가 가득한 숲. 밤마다 땅 밑의 전설이 얘기되는 곳. 숲의 상상이 우주를 가로질러 또다른 세상에까지 가닿는 순간을 체험하는 곳. 도란도란 사랑의 밀어가 뜨겁게 속삭이는 곳. 이 도시가 숲이 될 수 있을까. 지금 우리의 공동체는 어떤 숲을 조성하고 있을까. 시는 이 지구의 숲속에서 어떤 말들을 뱉어내고 있을까. 밤이 깊다. 고민하는 밤이 깊다. 쓰는 밤이 깊다. 쓰고 싶은 말들이 허공에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밤이 깊다.

 

- <시와 표현>, 2015년 5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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